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5세 (문단 편집) === 첫 아내, 마리아 루이사 === 펠리페 5세는 사보이아 공작이자 [[사르데냐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셋째 딸인 마리아 루이사와 [[1701년]] [[11월 3일]]에 결혼했다. 공교롭게도 첫 아내 마리아 루이사[* 외조부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오를레앙)|필리프 1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종손녀이므로 펠리페 5세와는 6촌간이다.]는 형수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여동생이었다. 즉, 겹사돈인 셈. 어쨋든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인 그에게 자신과 익숙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이틀밤 동안 계속 기다리게 만들었다.[* 신부는 첫날밤에는 [[사보이아 공국]]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오는 긴 여행의 피로로 지쳐있었고, 둘째밤에는 결혼식 피로연에서 먹은 음식으로 배탈이 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셋째날에야 비로소 [[성관계|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아 루이사는 '숨바꼭질'이나 '뻐꾸기 게임'같은 놀이를 하도록 제안하여 남편이 딱딱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하게 해줬다. 1702년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처음으로 아내와 떨어져 지낸 일은 펠리페 5세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모두에 심한 부담을 주었지만, 의지가 있던 그는 정부를 취하는 걸 거부했다. 펠리페 5세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서 서둘러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왕은 두 사람의 신체 기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할 정도로 낮이나 밤이나 계속 아내를 자기 곁에 두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펠리페 5세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건 뭐든지 왕이 하도록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이 신사는 아내를 굉장히 좋아했고, 왕비는 이런 사랑을 십분 활용했다. 왕비는 자기 방에 바퀴가 달린 작은 침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왕이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이 침대에서 자게 했다. 왕비를 흡족하게 하면 왕은 왕비의 침대에서 잘 수 있었고, 그건 왕에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는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스페인에 시녀장으로 보내진 위르생 공비[* 이전에는 공주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오류. 이 사람은 라 트레모이예 공작가문 출신으로 '공비'가 맞다. 위르생(Ursins)은 그녀의 남편이 오르시니 가문 출신이었기에 얻은 칭호인데 그녀가 위르생 여공 칭호를 받을 당시에 당시에 남편은 이미 사망했기에 여공인지 공비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하다. 참고로 이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로렌-기즈, 사보이아-카리냐노(프랑스어로는 사부아-카리냥) 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에게 크게 의지했는데, 위르생 공비는 마리아 루이사와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했다. 특히 마리아 루이사는 위르생과 매우 친했고 그녀를 자신의 대리 어머니로 생각한 듯하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내내,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는 위르생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하게 단결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정치적으로 기민했고 남편에게 있어 커다란 강점이었다. 하지만, 임신과 전쟁 기간 동안의 긴장, 잠 못 자는 밤들과 쌀쌀한 방은 마리아 루이사에게 버거운 것이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핵에 결려 목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죽어가는 왕비를 멀리서 진찰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예법상 의사가 왕비를 직접 만지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5세는 가장 애정이 깊은 남편인 동시에 가장 신중치 못한 남편이었다. 왕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오랫 동안 경험하지 못할 그 기쁨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싶어했고, 결국 죽어가던 왕비의 침대에서 억지로 떼어내졌다.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친 마리아 루이사는 1714년 2월, 언니이자 동서인 부르고뉴 공작부인처럼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펠리페 5세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신하들이 걱정하여 달래주어야 했을 정도다. 홀아비가 된 펠리페 5세는 메디나 코엘리 궁전에 틀어박혔다. 펠리페 5세는 울면서 마리아 루이사를 대신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양심이 정부를 두는 걸 허용하려 할 만큼 그의 건강이 금욕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펠리페 5세의 성적이고 심리적인 기벽은 외교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사망하자 마자 신하들과 [[유럽]]의 대사관들은 스페인의 새 왕비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일곱 달 후 펠리페는 31세의 나이로 [[파르마 공국]]의 공녀인 이사벨 파르네제와 재혼했고 이 거만한 여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루이스 1세(스페인)|루이스]] : [[1707년]] [[8월 25일]] ~ [[1724년]] [[8월 31일]] : 17세 * 펠리페 : [[1709년]] [[7월 2일]] ~ [[1709년]] [[7월 18일]] : 16일 * 펠리페 : [[1712년]] [[6월 7일]] ~ [[1719년]] [[12월 29일]] : 7세 * [[페르난도 6세|페르난도]] : [[1713년]] [[9월 23일]] ~ [[1759년]] [[8월 10일]] : 45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